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대 이집트 (문단 편집) == 건축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에스나 이집트 6.jpg|width=2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55e844e51b896c5351f7de856b361012.jpg|width=509]]}}}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이집트 에스나 7.jpg|width=448]]}}} || |||||| '''{{{#A0522D 가장 잘 보존되었다고 평가받는 [[에스나|{{{#A0522D 에스나}}}]]의 [[에스나 신전|{{{#A0522D 크눔 신전}}}]]. 채색의 흔적이 남아 있다}}}''' |||||| 고대 이집트 문명은 [[사막]] 지방에 세워졌기에 나무가 희귀했다. 따라서 대부분의 건물들은 말린 벽돌이나 바위들로 지어졌고, 오히려 썩기 쉬운 나무가 아니라 영구적인 석재로 만들어진 덕분에 몇천 년 동안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대다수의 석재들은 [[석회암]], [[사암]], [[화강암]] 등으로 지어졌다. 흔히 [[아부심벨]]처럼 거대한 암석들을 통짜로 깎고 쌓아 만든 유적들이 유명하기는 하지만 이집트인들은 건물을 지을 때 말린 진흙 벽돌을 많이 썼다. 나일 강에 쌓여 있는 진흙들을 틀에 넣어 굳힌 후, 이를 햇빛에 건조시켜 그대로 쌓았던 것이다. 비가 많이 오는 지방에서는 진흙이 흘러내리기 때문에 이렇게 짓지 못한다. 비가 거의 오지 않는 건조 기후의 이집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집트 건축의 주요 특징으로는 매우 좁고 개수도 적은 창문, 수직적이고 직선을 강조하는 건축 양식,[* 제4왕조 시절 [[아치]]가 등장하기는 했으나 주류는 쭉 뻗은 직선이었다.] 두꺼운 벽과 좁게 빽빽하게 세워진 굵직한 기둥, 사다리꼴 모양의 탑문 등이 있다. 특히 신전이나 왕궁처럼 중요한 건물의 내부는 기둥부터 천장, 벽까지 모조리 [[히에로글리프]]와 색색의 그림들을 넣어 장식했다. 염료가 지워져 쓸쓸한 현재의 모습과는 달리 고대 이집트 시대에는 붉은색, 푸른색, 초록색, 황금색 등 수많은 색들이 칠해져 있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gyptian-designs-for-palm-columns-mary-evans-picture-library.jpg|height=3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ba4551842866a316a5a74427002bc395.jpg|height=300]]}}} || || '''{{{#A0522D 기둥주 장식}}}''' || '''{{{#A0522D [[카르나크 신전|{{{#A0522D 카르나크 신전}}}]]의 평면도[* 대신전을 수직으로 잘라놓은 모습으로, 내부에 굉장히 기둥들이 빽빽하게 세워져 있음을 볼 수 있다.]}}}''' || 신전들의 기둥들을 보면 굉장히 인상적인 모습들을 하고 있다. 기원전 2600년경 전설적인 [[건축가]]이자 재상이었던 [[이모텝]]이 식물 뿌리, [[파피루스]], [[연꽃]], [[야자수]] 등의 모습을 본떠서 기둥주 장식을 최초로 고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꽃 모양이 보통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기둥주 장식으로 꼽는데, 제5왕조 시대 들어서 본격적으로 많이 쓰이기 시작했으며 이후 중왕국, 신왕국 시대에도 주된 기둥주 장식으로 사용되었다. 후기에 들어서는 펼쳐진 모양의 연꽃 장식이 위로 갈수록 다시 오므라드는 연꽃 봉오리 모양으로 발전했다. 특히 [[룩소르]]의 카르나크 대신전에 이 연꽃 주두를 가진 기둥들이 많이 세워져 있다. 굳이 연꽃 모양을 기둥 주두 장식으로 애용했던 이유는 종교적인 이유도 있다. [[이집트 신화]]에 의하면 세계는 늪지대 속에서 태어났는데, 진흙 속에서 자라나는 연꽃에서 세계의 창조 모티브를 보았다는 것. 물론 연꽃 장식이라고 해서 모두 똑같은 연꽃 모양은 아니고 지역이나 시대에 따라 모두 달랐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이집트 기둥.png|width=500]]}}} || || '''이집트 기둥 양식. 그리스 양식과 비교해보면 좋다.''' || 가장 왼쪽의 기둥은 '종상형 기둥'이라고 한다. 꽃봉오리를 형상화한 건데 대표적인 예시는 [[카르나크 신전]]의 [[아멘호테프 3세]] 신전. 하이집트의 상징 파피루스와 상이집트의 상징 연꽃 디자인을 섞어서 만들었다. 하이집트와 상이집트의 통합을 의미했기에 북쪽과 남쪽 주랑에 많이 배치했다. 두 번째 기둥은 '야자수형 기둥'이다. [[야자수]]의 모습을 본땄고 이집트 역사 가장 초기에 쓰였지만 제5왕조부터는 잘 쓰지 않았다. 다섯 번째 기둥은 [[하토르]] 여신의 머리를 새긴 독특한 모양의 기둥으로, [[중왕국]] 이래 많이 쓰였고 매우 흔한 기둥주들 중 하나였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는 [[덴데라 신전]]이다. 여섯 번째 기둥은 [[연꽃]]형 주두인데 사원에서만 사용했다. [[고왕국]]과 [[중왕국]] 시대에 많이 쓰이다가 [[신왕국]] 시절에 빈도가 뜸해졌지만, 이후 그리스-로마 시대에 다시 인기를 얻었다. 마지막 기둥은 [[파피루스]]형 기둥이다. 가장 오랫동안 이집트인들에게 사랑받은 디자인인데 화려하고 기품있는 분위기 덕분에 여러 신전에 즐겨 사용됐다. 고대 이집트 건축의 대명사인 [[피라미드]]의 경우 대략 4,500여 년 전 제4왕조를 중심으로 한 [[이집트 고왕국]] 시대에 가장 많이 지어졌다. 물론 후대의 왕조들도 조금조금씩 피라미드들을 짓기는 했지만, 기자에 세워진 [[기자의 대피라미드|대피라미드]]나 [[카프레의 피라미드|카프레]], [[멘카우레의 피라미드]]처럼 거대한 피라미드들은 건설하지 않았다. 파라오의 무덤으로 세워졌던 피라미드들은 왕의 권위와 신성성 그 자체였으며, 워낙 크기가 엄청났기에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경탄했다고 한다. 고층 건물들에 익숙한 현대인들이 봐도 놀라울진대 고대인들의 눈에는 더욱 위대하게 보였을 것이다. 특히 [[로마 시대]]에 이미 피라미드는 유명한 관광 코스였다. 현재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지만 피라미드 바로 옆에는 장대한 장례 신전들이 줄세워 세워져 있었고, 역대 파라오들은 정기적으로 이곳에서 제사를 올렸다. 또한 외벽의 [[대리석]] 포장재가 모조리 뜯겨나가 울퉁불퉁한 현재의 모습과 달리 고대에는 피라미드 외벽이 백색 대리석으로 덮여 매끈매끈해 꽤나 아름다웠다. 현재 카프레의 피라미드 위쪽에 조금 남아 있는 것이 바로 백색 대리석.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에는 '피라미디온'이라고 해서 황금으로 도금한 캡 스톤을 얹었다. 카프레의 피라미드 앞에는 이집트에서 가장 거대한 [[스핑크스]]가 하나 조각되어 있는데, [[석회석]]을 다듬어 만들었고 높이는 약 20m 정도 된다. 피라미드 내부는 딱히 복잡하지 않다. 현대인들은 미디어나 게임의 영향으로 피라미드 내에 미로가 있거나 비밀 통로들이 많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실제로는 중앙 통로를 통해 곧바로 관이 있는 묘실까지 직행하는 굉장히 단순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기자의 피라미드를 포함해 중앙 통로를 제외한 대부분의 통로들은 [[도굴꾼]]들이 뚫은 것. 가끔씩 피라미드의 건축가들이 만든 통로들도 있지만, 지반의 경도를 실험해보거나 어디까지 파낼 수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만든 거기 때문에 연결된 보물 같은 거는 없다. 피라미드가 등장하기 이전 이집트에서는 '마스타바' 형식의 무덤에 시신을 안장했다. 피라미드의 초기 단계이기도 했던 마스타바는 직육면체 모양의 무덤으로, 건물 아래에 미라를 묻었다. 직육면체 모양이어서 [[아랍어]]로 '직사각형의 벤치', 즉 마스타바라고 불리며 현재처럼 마스타바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지표면에 드러나있는 직육면체 모습의 건물 안에는 간단한 장례 신전과 기도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 통로를 뚫어 지하에 매장실과 부장실 등을 만들었다. 매장실로 내려가는 계단은 모래나 자갈 등으로 막아 도굴꾼들의 침입을 방지했고, 매장 절차가 끝난 이후에는 혹시 모를 침입을 막기 위해 아예 거대한 판석으로 통로를 완전 봉쇄했다. 마스타바에 묻힐 수 있는 사람들은 파라오나 고위 귀족에 한정되었고 일반인이나 평민들처럼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그냥 간단하게 시신을 천에 싸서 사막에 묻는 경우가 많았다. 마스타바는 주로 [[이집트 선왕조]] 시대와 [[이집트 초기 왕조]] 시대에 많이 지어졌는데, 현재는 남아 있는 것들이 많지 않으며 그마저도 대부분 다 도굴당해 버렸다. 사실 거대한 피라미드를 짓는 일은 도굴꾼들에게 제발 내 무덤 좀 털어가 달라고 동네방네 광고하는 짓이나 다름없었다.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다가 피라미드를 지어놨으니 대부분의 피라미드들은 몇백 년도 가지 못하고 이미 고대에 깡그리 도굴당했던 것이다. 당연히 파라오들도 이 현실을 잘 알고 있었는데, 제 무덤만큼은 절대 도굴당하기 싫었던 파라오들이었기에 나중에는 [[왕가의 계곡]]이라는 곳에 석굴을 파서 그 안에 미라를 묻는 방법을 썼다. 무덤에는 미라와 함께 온갖 화려한 부장품들이 묻혔으며, 무덤의 위치는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졌다. 하지만 이 방법도 도굴꾼들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도굴꾼들이 눈에 불을 켜고 왕가의 계곡을 샅샅이 뒤지면서 거의 대다수의 무덤들이 도굴당했고, 살아남은 건 [[투탕카멘의 무덤]] 딱 하나뿐이다. 뿐만 아니라 [[신왕국]] 멸망 후 혼란기가 도래하자 자금난에 시달리던 파라오들이 대놓고 선대 파라오들의 무덤을 털어 그 안의 부장품들을 꺼내는 일도 있었기에 멀쩡한 무덤이 있었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32b607bfde24f1b11409038f5a28c23.jpg|width=4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karnakreconstruction.jpg|width=42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Opet-Festival-at-Karnak.jpg|width=448]]}}} || || '''{{{#A0522D 일반적인 이집트 신전의 구조}}}''' || '''{{{#A0522D 카르나크 신전의 내부 복원도[* 현재와 달리 모두 색이 화려하게 칠해져 있었다. 참고로 카르나크 대신전은 이집트 내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웅장했는데, 카르나크의 기둥들은 그 높이가 21m에 달했다.]}}}''' || '''{{{#A0522D 오페트 축제가 열리는 카르나크 신전}}}''' || 이집트의 고대 신전들을 보면 기본적으로 사다리꼴 모양의 탑문 2개가 정문으로 세워져 있다. 널찍한 정문을 지나면 그 뒤에 천장이 열린 뜰들과 열주들이 빽빽한 홀들이 여러 개가 있으며 이들을 지나면 신전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구조였다. 보통 뒤쪽으로 들어갈수록 공간이 좁아지고 더욱 어두워졌다. 가장 바깥쪽을 에워싸고 있는 사원 외벽은 굉장히 두껍고 높았다. 신전 자체가 신이 거하는 곳이자 천상계의 현신이었기에 이를 보호한다는 의미로 높은 벽을 쌓았기 때문이었다. [[이집트 말기 왕조]] 시대 들어서 적군의 침입이 빈번해지자 진짜 공성에 사용하기 위해 벽을 높게 지은 경우도 있다. 신전 내부와 바깥쪽에는 신성한 연못을 파 의식에 쓸 물을 담아놓거나 의식을 치르기 전 신관들이 몸을 씻는 장소로 사용했다. 또한 정문 바로 앞에는 [[스핑크스]] 석상들과 [[오벨리스크]]들이 연이어 쭉 세워져 있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사람들이 이 길을 따라 정문으로 들어오면 천장이 열린 안뜰을 지나 기둥들이 촘촘하게 세워진 내부의 홀로 들어갈 수 있었다. 모래 폭풍 때문에 창문을 크게 내지 않던 이집트라 홀 내부는 꽤 어두웠고, 이 어둠이 오히려 사원 내부의 신성한 분위기를 더했다. 이 홀을 지나면 다시 천장이 열린 안뜰이 나왔고, 이를 지나치고 더욱 깊숙이 들어가서야 신상이 모셔진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었다. 보통 신전의 권위가 높거나 중요할 수록 지성소에 이르기까지 거쳐야 하는 홀과 안뜰의 수가 많았다. 신관들은 성소에서 치러지는 예식의 장엄함을 극대화하기 위해 일부러 성소로 비쳐드는 햇빛을 막거나 창문을 내지 않았기에 성소는 굉장히 어두운 분위기였다.[* 다만 태양신 [[아텐]]의 신전만은 예외였다. [[아케나텐]]은 햇빛 자체를 신성시했으며, 직접 햇빛을 보아야만이 아텐 신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아텐 신의 성소는 천장이 뚫려 있어 매우 밝았다.] 보통 신전의 맨 뒤쪽에 자리해 모든 뜰과 홀들을 통과하고 나서야 들어갈 수 있는 굉장히 신성한 장소였는데, 대부분의 의식들이 이곳에서 치러졌으며 이집트인들은 이곳에 신이 직접 존재한다고 굳게 믿었다. 지성소에는 보통 황금과 보석으로 치장한 신의 석상들이 조각되어 있거나 죽은 파라오의 상들이 모셔져 있었다. 혹은 영혼이 출입한다고 믿었던 '가짜 문'이 조각되어 있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이집트인들은 이 문을 통해 현세가 사후세계, 그리고 천상계와 통한다고 믿었다. 보통 성소의 장식이 신전 전체에서 가장 화려했는데, 일부 신전에서는 금을 녹여 [[이집트 상형문자|상형문자]]를 새겨 넣거나 금판을 통째로 벽에 두르는 등 호화찬란하기 짝이 없게 성소를 꾸미기도 했을 정도였다. 성소 옆에는 보조 신전들이 여러 개 있었다. 신전에서 모시는 신 외에 다른 신들이 이곳에 모셔졌으며, 아니면 제례 의식에 사용할 도구를 보관하는 용도였다. 성소가 신전 맨 뒤쪽에 있었기에 오히려 신전의 뒤쪽 외벽이 굉장히 성소와 가까운 구조였는데 신전에 들어가지 못했던 평민들이 이 사실을 알고 일부러 이 뒤쪽 외벽에 와서 기도를 올리고는 했다. 이집트에서 남아 있는 유적들을 보면 하나같이 신전과 사원 밖에 없고 [[궁전]]이나 [[왕궁]]은 찾아보기 힘들다. 평민들의 가옥이야 대충대충 지었을테니 남아 있는 게 없을 수 있다지만 나름 크게 지었을 왕궁 유적이 왜 없는지에 대해서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건 '''궁전을 진흙 벽돌로 지어서''' 그렇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신성하고 영원해야 할 신전과 무덤은 암석을 통째로 깎아서 쌓거나 아예 암벽을 파서 지었다. 그랬기에 수천 년이 지나도 현재까지 상당수가 보존될 수 있었다. 하지만 주거용 건물은 모두 진흙 벽돌을 쌓아서 지었는데, 파라오가 사는 궁전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만 크기가 더 크고 화려한 것이 차이가 있었을 뿐. 그래서 대부분의 이집트 왕궁 유적들은 이미 시간이 지나며 삭아서 내려앉았고, 현재 남아 있는 이집트 왕궁 유적지는 거의 없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카르낙 이집트 1.jpg|width=660]]}}} || 이집트 조각 기법의 수준을 알려주는 [[룩소르 신전]]의 스핑크스. 파손된 덕에 조각상 내부에 공간을 두었다는 점을 알 수 있게 되었다. 한반도에서 7세기 초까지만 해도 석불의 팔과 몸 사이에 공간을 두는 것이 고급 기법으로 여겨지던 것과 비교해보면 돌의 재질을 차치하더라도 대단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집트의 석조 건축은 엄청난 규모에 세밀함까지 갖춘, 근대 이전 최고의 수준을 자랑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